청솔초등학교 로고이미지

계기교육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4·19 혁명
작성자 김주현 등록일 13.04.19 조회수 708
첨부파일

4·19 혁명은 민주 이념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럼 시민들은 왜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는 지금과 같이 국민이 직접 투표하여 선출하는 ‘직접선거’ 방식이 아니고 4년마다 국회가 대통령·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이었습니다. 1952년은 대통령을 뽑는 해였는데, 그때 국회는 여당정권을 잡고 있는 정당의원의 수가 야당 의원의 수보다 적었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대통령 선거 방식을 바꾸는 내용으로 헌법을 바꿨습니다. 이 개헌은 토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의결이 강제되었다는 점 등에서 위헌적 요소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헌법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당선됩니다. 그럼 그다음 대통령 선거를 살펴볼까요?



1954년에 의원을 뽑는 선거가 있었는데요, 이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이 승리하여 국회는 여당 의원이 다수를 이루게 됩니다. 국회에서 다수가 된다는 것은 국회가 결정하는 일에 유리한 위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의원수의 2/3가 찬성하면 헌법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는데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그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또 대통령으로 당선되려면 헌법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당은 1954년 8월,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무제한으로 대통령을 할 수 있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135명이 찬성하게 됩니다. 그 무렵 국회의원은 203명이었는데 개헌안이 통과되려면 전체의 2/3인 135.3333명이 찬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0.3333명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에 136명의 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여당은 4사5입이라는 수학 원리다른 말로는 ‘반올림’으로 5보다 작은 수는 버리고 5와 5보다 큰 수는 올리는 방법를 적용하여 203명의 2/3은 135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전날 부결된 것을 취소하며 개헌안 통과를 결정합니다. 이 개헌을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3선 대통령이 됩니다.

 

다른 대통령 후보의 서거로 이승만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83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자유당이 정권을 계속 잡기 위해서는 부통령이 누가 당선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서거할 경우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유당은 선거에 이기기 위하여 부정 선거를 준비했습니다. 선거 이전에 4할 40%의 사전 투표를 하고, 3명, 5명씩 조를 짜서 투표를 하게 하는가 하면 공무원에게 선거 운동을 강요하고 완장부대를 동원하여 위협하는가 하면 참관인을 쫓아내는 등 옳지 못한 방법으로 선거에 이기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야당의 선거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학생들을 일요일에도 등교시켰습니다. 그러자 학원의 자유를 외치는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4·19 혁명은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입니다.



드디어 정·부통령 선거날인 3월 15일이 되었습니다. 부정으로 이루어진 선거에 반대하는 시위가 마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자 경찰은 총을 쏘아 진압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시위는 마산뿐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외국 신문도 3·15 부정 선거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학생의 주검이 발견됩니다. 이를 본 시민들은 분노하여 ‘민주주의 바로잡자’라는 구호 아래 더 큰 시위를 벌였습니다. 4월 18일 서울에서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평화 행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깡패들에게 공격을 당했고, 이 사건은 학생과 시민들을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4·19 혁명을 일어나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4월 19일, 학생들이 “3·15 선거는 무효다. 공명선거 다시 하라.”고 외치며 경무대로 향하자, 일반 시민들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은 총을 사용하여 막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이후 각 대학의 교수들까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항의하고 시민들과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며 결국 대통령을 사임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4·19 혁명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였으며 대한민국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 헌법에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이전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행복한 사회 (53)
다음글 식목일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