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초등학교 로고이미지

계기교육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5․18민주화운동
작성자 김주현 등록일 13.05.16 조회수 717

< 5․18민주화운동 >

1980년 5월 신군부의 독재정치에 항거하여 일어난 5․18민주화운동은 민중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민주 인권 평화의 공동체를 보여 준 사건으로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부정선거 등을 통해 장기독재를 유지해 오던 대통령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에 국민들은 장기군부독재의 몰락과 새로운 민주화 시대의 시작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는 12월 12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을 총칼로 짓밟았다. 분노한 국민들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1980년 봄이 되자 전국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로 불타올랐다.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전시상태에서 발효되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학생운동의 지휘부와 김대중을 비롯한 주요 정치 인사들을 체포, 구속하였으며 특수 부대를 전국 주요 도시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다. 계엄군은 시위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당하였고 분노한 시민들이 함께 시위를 하자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는 금남로 일원에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의 학살행위에 맨주먹으로 맞서던 시민들은 5월 21일 (구)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경찰서 등의 무기고에서 획득한 무기로 무장하고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였다. 시민군의 저항에 계엄군은 광주시 외곽으로 물러나 광주시를 포위하였다.

고립된 광주에서 시민들은 도청을 장악하고 거리를 청소하는 등 자발적으로 질서를 유지하였다. 많은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을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으며, 단 한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군을 위해 시민들은 쌀과 김치를 거두었고 양동시장을 비롯한 시장 상인들은 밥을 지었다. 모두가 한 가족처럼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었다. 이 모든 것은 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과 도덕성, 자치능력에 의해 가능했다. 5월 27일 새벽 마침내 계엄군은 탱크를 앞장세우고 시내로 진입하였고 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로써 열흘 동안 이어 오던 광주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5·18민주화운동은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군부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를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한층 성숙한 민중의식을 보여 주었으며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더불어 열흘 동안 광주시민들이 보여 준 높은 도덕성과 시민의식은 세계인들의 가슴에 민주 인권 평화의 도시로 남게 되었고 같은 처지에 있던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에게 민주화 운동의 살아있는 사례가 되어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 오늘은 무슨 날일까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날 이예요. 시민들의 힘으로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민주화를 요구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된 날이죠.

Q: 5·18민주화운동은 언제 일어났나요?

A: 1980년 5월 18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이지. 그래서 열흘간의 항쟁이라고도 하지.

Q: 그런데 부르는 명칭이 여러 개인데요. 어떻게 달라요?

A: 시대에 따라, 부르는 사람이나 집단의 역사를 보는 관점과 생각이나 평가에 따라 다르게 불려 졌단다. 먼저 ‘광주사태’는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된 무장폭도들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일으킨 불순한 사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5·18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주로 쓰던 명칭이지. 다음으로 ‘5·18광주민중항쟁’이란 명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광주에서 민중들이 군부독재에 저항해서 싸운 사건이라 의미를 담고 있지. 지금도 광주시민들이 가장 많이 쓰고 있는 대표적인 명칭이지. 마지막으로 ‘5·18민주화운동’이란 1997년 5월 9일 정부에서 국가기념일로 정식 제정하면서 붙인 명칭이지. 민주화를 요구한 시민들의 저항임을 공식적으로 국가가 인정한 거야.

Q: 그럼 5·18은 왜 일어난 거예요?

A: 5·18은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난 사건이야. 그럼 왜 일어났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겠지. 5·18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오랜 군부독재에 시달려야 했단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1979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살해당하기 전까지 장기독재를 했어. 그런 그가 죽자 국민들은 민주화를 향한 꿈을 꾸었지. 그러나 그해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중심이 된 신군부는 군사쿠데타를 통해 국민들의 꿈을 짓밟고 다시 군부독재를 시작했단다. 국민들은 분노했지. 마침내 1980년 봄이 되자 전국의 대학생들이 앞장 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어. 이를 ‘민주화의 봄’이라고 한단다. 그러다 5월 17일이 되자 신군부는 전시 상태에서 내려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어. 학생운동을 이끌던 지휘부와 김대중씨를 비롯한 주요 정치 인사들

이 불법으로 체포되고 구속되었지. 국민들의 오랜 민주화의 꿈은 무참하게 짓밟혀버렸단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비상계엄 확대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신군부는 계엄군을 통해 무자비하게 무력으로 진압한 거야.

Q: 그래서 5·18이 광주에서 일어나게 된 거군요.

A: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대학생들과 계엄군들 간에 충돌이 생겼어. 계엄군들은 학생들을 곤봉과 총으로 무자비하게 짓밟았지.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금남로를 중심으로 모여 시위를 하자 공수부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진압했지. 같은 나라의 군인이 시민들을 향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그것도 환한 대낮에 서슴지 않았던 거야.

Q: 그럼 시민들은 그냥 당하고만 있었던 거예요?

A: 너라면 가만있을 수 있었겠니? 우리가 살고 있는 광주는 예로부터 의향의 도시였잖아. 나라가 어려울 때 정의를 위해 항상 먼저 일어섰던 곳이 우리 고장이잖아. 당연히 광주시민들은 그런 계엄군들과 신군부의 만행에 항의했지. 5월 20일에는 금남로에서 택시와 버스기사들이 자동차의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차량시위를 하였고, 시민들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지 않고 거짓 보도를 일삼던 광주MBC건물을 비롯해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대하는 정부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노동청과 광주세무서 등의 공공기관들을 불 태웠단다.

Q: 우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치 전쟁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그럼 왜 시민들이 총을 들게 된 거예요?

A: 직접 경험하지 않은 너희들에겐 마치 전쟁 영화를 보는 것 같을 거야. 하지만 이것은 영화가 아니야. 사실이란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거지. 그래서 우리 역사가 얼마나 슬프고 애절한지 모르겠구나. 시민들이 총을 들기 시작한 것은 계엄군들이 총으로 시민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시민들이 들기 시작했던 거란다. 계엄군들의 총에 의한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5월 20일 광주역 광장에서였지. 집단 발포가 일어난 것은 그 다음 날이야. 5월 21일 1시경, 구 전남도청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단다. 생각해 보렴. 그 앞에 있던 수 천 명의 시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순식간에 도청 앞 금남로가 피로 물들고 마치 지옥과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어. 환한 대낮에 같은 나라의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거야.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에 맞서 싸우기 위해 경찰서와 파출소의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서 무장하기 시작한 거야. 이들을 ‘시민군’이라고 한단다.

Q: 그럼 계엄군하고 시민군하고 막 싸우기 시작했겠네요.

A: 그랬단다. 그런데 시민군들만 싸운 건 아니야. 광주시민전체가 싸운 셈이지.

시민들이 무장을 하자 계엄군들은 광주시 바깥으로 후퇴해서 고립된 거야. 광주시민들은 이때부터 도청이 무력으로 진압당하기 전까지 두려움에 떨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냈어. 생필품이 부족하자 서로 나누었고,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피가 부족하자 헌혈을 하기 위해 줄을 섰어. 주먹밥을 만들어 서로 나누었단다.

Q: 그러다 어떻게 되었어요?

A: 마침내 5월 26일이 되자 계엄군은 최후통첩을 했어. 도청에 남아 있던 시민군들

은 학생들과 여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지.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은 마침내 27일 새벽 계 엄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어. 그 날 새벽 계엄군이 쳐

들어오자 시민군들은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겼어.

Q: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나요?

A: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도청 앞과 금남로고 있단다. 열흘 동안의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통계는 2004년 광주시에서 사망 154명, 부상 3,208명, 행방불명 70명으로 발표했어. 하지만 그 뒤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있고, 아직도 행방불명 된 사람들의 시신들을 찾지 못하고 있어. 특히 그 당시 시신들이 암매장되었다는 시민들의 제보도 끊이지 않고 있어서 정확한 집계는 아직 어렵다고 봐야지. 지금도 그들을 찾기 위해 유가족회 등을 비롯한 관련 단체들이 애를 쓰고 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다 보니까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Q: 그런데 혹시 희생자들 속에 학생들은 없었나요?

A: 학생들도 많이 참여했단다. 물론 대다수는 시민들과 대학생들이었지만 중·고등학생들도 많이 참여했어. 물론 희생자도 많았지. 대표적으로 헌혈을 하고 돌아오던 중 계엄군의 총에 사망한 박금희라는 학생도 당시 고등학생이었단다.

Q: 그럼 5·18민주화운동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나요?

A: 아니야. 비록 1980년 오월 광주는 도청이 진압당하면서 열흘간의 항쟁으로 끝이 났지만 오월이 남긴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그 뒤 거대한 불길로 다시 살아났단다. 6년 뒤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국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한 ‘6월민주항쟁’을 맞게 되고 결국 노태우 정부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단다. 그리고 1988년에는 국회에서 오월 광주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광주청문회’가 열려서 광주의 진실을 알릴 수 있었지. 그러다 1997년에 국가 기념일로 제정되었단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노력한 과정이 있었다는 걸 우린 잊어선 안 되겠지.

Q: 그런데 왜 사람들은 광주가 위대하다고 하지요?

A: 그것은 항쟁기간 동안 보여준 광주시민들의 높은 도덕성과 시민의식 때문이야. 열흘 동안 광주는 고립되어 있었고 혼란스러웠지. 그러나 그 열흘 동안 단 한건의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단다. 시민들은 은행 등 금융기관 앞에 “이 곳은 우리의 소중한 재산입니다. 손대지 맙시다”라고 쓴 종이를 붙여놓았는데, 종이 한 장이 그 많은 돈을 지켰던 거야. 그 뿐이 아니야. 계엄군에 의해 다친 사람들을 위해 피가 모자라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병원 문 앞에 헌혈을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고, 시민들은 쌀과 김치를 걷고 밥을 지었어. 양동시장을 비롯한 시장 상인들은 아낌없이 자신들의 물건들을 내어놓았고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었어. 시민들 모두 내 것, 네 것이 없었지. 마치 한 가족처럼 공동체를 만들었던 거야. 생각해 보렴. 어떤 나라에서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니. 우리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민혁명으로 꼽는 프랑스혁명에서도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어. 그래서 아시아 지역에있는 나라들 중에서 오랜 군부독재에 시달리고 있던 나라들은 광주의 오월을 통해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하고 또 광주시민들처럼 민주화를 요구하는 항쟁을 일으키기도 했단다.

Q: 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우리도 5·18정신을 지키고 싶어요.

A: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볼까? 어려운 이웃을 돕고 미래 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서 실천해 보는 거야.해. 당시 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들이 대한민국을 없애기 위해서 일으켰다’고 했어. 하지만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광주시민들을 ‘빨갱이, 폭도, 불순분자, 국가전복세력’등으로 매도하고 있는 거야. 이는 반드시 바로잡혀져야 해. 그리고 광주에 공수부대를 파견하고 총을 쏘아 시민들을 학살하도록 명령을 내린 사람들이 누구인가도 밝혀야 해.

또 하나 광주시민들을 학살하도록 명령을 내린 사람들과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과 역사의 심판이 좀 더 엄중해질 필요가 있단다. 지금도 사건의 최고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을 역임했던 전두환, 노태우는 사면 후 광주시민들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잖니? 역사는 항상 진실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걸 보여 줘야 되지 않을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끔찍했던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무서운 경구도 있잖아. 기억하고 계승하고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다 먼저 가신 분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를 꽃 피우는 것. 아마 그것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쿠데타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이 무력 등의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빼앗는 것

☞공수부대

:전쟁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국가 최정예 부대☞대통령 직선제

:모든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대통령을 뽑는데 참여하는 선거제도. 반대말은 대통령 간선제

☞계엄령

:대통령의 암살이나 전쟁, 테러와 같이 혼란한 상황에서 군대가 정부를 대신해 국민을 통제하는 상태

 

이전글 호국보훈의 달 (2)
다음글 스승의 날(5월 15일)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