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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한국전쟁
작성자 문미주 등록일 18.05.29 조회수 468

625전쟁기념일

 

625전쟁기념일의 유래

19506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국에서의 전쟁을 상기하여 국민의 안보의식을 제고하기 위한 날이다.

 

625전쟁

1) 배경

1948년 한반도의 남과 북에 각기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민족 내부의 대립과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은 북진 통일을 내걸었고 북한은 국토완정을 주장했다. 서로에게 있어 상대방은 공존할 수 없는 타도 대상이었다. 더구나 38선은 단순한 남과 북의 분단선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부딪치는 국제적 진영 대립의 최전선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9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이후 전쟁 준비를 본격화 하였다. 소련으로부터 군사장비를 대대적으로 지원받았다. 중국도 국공내전이 끝나자 중국 인민해방군에 가담하여 싸웠던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선인 무장부대를 보내주었다. 김일성은 19503월 스탈린과 만나 전쟁계획을 확정하고 5월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결정적 시기를 기다렸다.

김일성은 전쟁 수행을 위한 대내외적 조건이 북한에 크게 유리하다고 보고 있었다. 중국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하여 든든한 지원세력을 확보하였고 미국은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위선에서 제외하고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시사를 주었다. 부수상 박헌영은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인민봉기를 주도하여 남한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호언하였다. 무엇보다 북한은 정치와 군사력 면에서 남한에 비해 월등하게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북한은 전쟁을 개시하기 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가 평화통일을 위한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정당·사회단 체 대표자협의회를 갖자고 하거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가 남북한의 국회와 최고인민회의가 전조선 입법기관으로 연합하자고 하는 등 평화공세를 전개하여 전쟁 의도를 감추고자 시도하였다.

2) 경과

북한 인민군은 1950625일 새벽을 기하여 전 전선에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 군사적 열세에 있던 한국군은 일방적으로 패퇴하여 전쟁 발발 두 달여 만에 남한 지역 거의 대부분을 인민군이 점령하였다.

전쟁 과정은 대개 다섯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단계는 9월 중순까지의 인민군 공세기로, 인민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우리 정부는 대전, 대구, 부산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8월 말에는 인민군 주력부대가 낙동강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미국은 즉각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해·공군에 출동 명령을 내리고 유엔 안보리를 소집하였으며, 유엔은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하였다. 71일에는 16개국이 참가한 유엔군이 부산에 상륙하였고,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 엔군에 이양한다는 대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6·25 전쟁은 남북한 사이의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2단계는 11월 초까지의 유엔군 공세기이다. 유엔군이 915일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928일 서울을 수복하 였으며, 낙동강 전선에서도 전면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유엔군은 10138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했으며, 10월 말까지 청천강 이북의 산악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북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3단계는 19511월 말까지 인민군과 중국군의 합동 공세기로, 유엔군은 퇴각하여 북위 37도선까지 밀려 내려왔고 서울이 다시 공산군 수중에 들어갔다.

4단계는 19516월까지의 전선 교착기로, 유엔군과 공산군이 38선 부근을 중심으로 한 중부전선에서 일진일퇴를 거 듭하며 어느 쪽도 일방적 승리를 보장받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소 간 협상을 거쳐 소련이 유엔에서 휴전을 제의하고 유엔군 사령관이 공산군 측에 정전회담을 제의하였으며,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팽더화이가 이에 동의하여 휴전협상이 진행되게 되었다.

5단계는 19537월까지 약 2년간에 걸친 휴전협상기이다. 1951710일 개성에서 휴전협상이 시작되었지만 분계 선을 유리하게 획정하기 위한 소모전적인 전투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19537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일시 휴지하는 것이지 정치적·법적으로 전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3) 결과

6·25 전쟁은 민족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양측에 총 600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입혔으며,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남북 간에 극단적인 적개심과 증오심을 남겨 놓았으며, 분단체제를 공고화시킴으로써 민족동질성을 파괴하고 남과 북을 이질적인 사회로 바꾸어 놓았다.

 

 

 

출처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http://mpva.tistory.com/2393

625전쟁 관련 주요 인물

우리의 바다를 지킨 손원일 제독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 제독은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에 참전하였다. 손원일 제독은 우리 바다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신념 아래 광복 이후 1945년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하였고, 현재 해군사관학교의 모체인 해군병학교 등을 창설하였다. 손원일 제독은 광복 이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힌 적이 있고, 그의 아버지 손정도 목사 역시 독립운동에 몸바친 분이다.

지하참호를 폭파한 육탄 10용사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54일 새벽, 개성 북방에 주둔하고 있던 2000여명의 북한군 대대병력은 송악산 연봉 동방으로부터 개성 북방의 292고지, 비둘기고지, 유엔고지 등을 점령하고 개성을 공격했다. 감제 아군 진지를 점령당해 위기에 빠진 국군은 다시 이 고지를 탈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북한군이 깊이 6미터, 지름 20센티미터의 삼중으로 된 지하참호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때 제1분대장 서부덕 이등상사 외 9명의 용사가 나서서 특공대를 편성하여 목표를 탈취할 것을 결의했다. 그들은 57파운드 폭탄을 휴대하고 총알과 포탄이 쏟아지는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의 지하참호를 폭파함으로써 국군이 그 고지를 다시 탈환할 수 있게 했다.

 

교복을 입고 전선으로 나간 학도의용군

1950625, 전쟁으로 학교를 빼앗긴 학생들이 구국전선에 나섰다. 수원, 대전, 대구를 비롯해 전국에서 7000여명의 학도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이들 학생들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내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만으로 젊은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것이다.

 

현해탄을 건너온 재일 학도의용군

일본에서 조국의 도움 없이 민족적 차별과 멸시를 받으면서 살던 재일동포 자녀와 유학생 642명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조국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귀국한 뒤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 중 135명은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전쟁 중에 나라땅을 지킨 독도의용수비대

625전쟁으로 영토의 획정이 불안정한 19522, 일본 정부가 독도를 자국 영토로 주장하면서 독도와 주변해역에 출어 중인 우리 어민들의 조업을 방해했다. 이때 33명의 울릉도 출신 제대 군인들은 독도를 수호하기 위해 정부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했다. 이들은 19534월부터 195612월까지 38개월 동안 고난을 물리치면서 독도를 끝까지 지켰다.

 

<참고문헌 및 출처>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http://mpva.tistory.com

국가보훈처 꾸러기 보훈광장 E-Book. 󰡔얘들아, 호국보훈의 달 이야기를 들어볼래?󰡕 http://kids.mpva.go.kr/ebook/2012_hogook/JBook.htm

통일부 통일교육원 남북관계 지식사전 http://www.unied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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